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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평윤씨태위공파교리공종회

가문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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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m01.png 19세 영의정 효성공 휘 인경

 

papyeongyun4_05-6b.jpg효성공 묘갈명(국역)

우리 선조인 영의정을 지내신 휘 인경(仁鏡)의 자는 경지(鏡之)요 시호는 효성(孝成)이니 73세의 수를 누리셨다. 살아생전에 양주 동오리 송산 선산 곁에 유택을 정함에 후일 장지로 삼았다. 근세에 도시개발로 인해 부득이 적성 노곡방 적대촌 뒷산 동쪽 언덕에 이장하였고, 전배인 우봉김씨와 후배인 전주이씨 삼위 분을 합장하였으니 선대 묘제의 경우를 따른 것이다. 세대가 멀어지고 사적이 인멸되었으며 보승 또한 소략하여 그 남기신 업적을 상고하기 어려웠더니 호음 정사룡이 찬술한 신도비명이 있어 그 삶을 근거할 수 있어 이에 의거하여 소략히 그 생평(生平)을 서술하노라.

 

papyeongyun4_05-6a.jpg선공(先公)께서는 나면서 효성이 독실하였으나 어려서 모친상을 당하여 그 슬퍼함이 몸이 상할 정도였으며 그 치상(治喪)함이 모두 예범에 맞았다. 장악 첨정으로 승진하였을 적에는 아버지가 늙어 시봉해야함을 이유로 태안 군수를 자청하여 나갔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출입을 삼가고 여막에 의지하여 죽만을 먹으며 삼년상을 마치니 효행으로 표창하고자 하는 의론이 있었다. 사양함이 극히 간절하여 그 의논을 거두었으나 그 명성은 더욱두터워졌다. 국사를 처리함에 대체(大體)를 지니기에 힘썼고 사람을 접하고 아래를 거둠에 너그러움과 온화함으로 일관하여 모든 이의 환심을 얻었다. 연산군의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일시의 명현들이 모두 그 화를 입었더니 중종이 반정하심에 대교 김영이 떨쳐 일어나 이르기를 “사화가 일어남에 사필이 바르게 기록치 않는다면 나라에 사관이 없는 것과 같다”라고 하여 드디어 동료인 김흠조, 정충량, 소세양, 우리 선조인 휘 인경과 모모 등이 더불어 상소하여 모든 억울함을 바로 잡았으니 의리와 사정(邪正)을 분별하는 마음이 분명치 않았다면 어찌 쉽사리 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

 

우리 윤씨의 계보는 파평에서 나왔으니 고려 태사공 벽상공신 신달(莘達)이 시조이시다. 윗대의 계조는 교리공 비문에 실려 있으므로 다시 기록치 않는다. 전배는 우봉 김씨로 현감을 지낸 지수의 따님이고, 후배는 전주 이씨로 영남의 따님이다. 두 분 다 후손이 없어 종질인 현(俔)으로 양자를 삼았으니, 인산절제사를 지내셨다. 손자는 사철, 사민, 사신, 사흠이고 종현손은 번다하여 기록치 않는다. 이어서 이르노니, 효는 백행의 근원이니 살아 계실 때나 돌아가셨을 때나 성의와 힘을 다했도다. 사람을 대함에 온화함으로 일심(一心)의 주(主)를 삼았으니 온 나라 사람이 우러러 보았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