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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문신이인 익헌공 윤양래는 본관은 파평이요 시조로부터 25世 태위공파로 자는 계형 호는 회와로 시호는 익헌(翼獻)이다. 1673년 아버지 경주부윤 이(理)와 어머니 이의윤의 딸 사이 아들로 태어나 1699년에 식년시 생원과에 급제 후 1708년 식년시 문과에 급제하여 주서(注書, 정7품)로 있을 때 글씨를 빨리 써서 비주서(飛注書)라는
별명을 얻었다.
1712년 지평을 거쳐 정언 장령 필선 헌납 사서 집의를 역임한 뒤 1716년 5월부터 10월 18일까지 담양부사를 거처 1717년 경상도 암행어사가 되었다.
1718년 광주부윤으로 있을 때 금령을 어기고 남한산성의 나무를 제멋대로 찍어서 사용했다고 파직 당했으나 곧 복직되었다. 1720년 좌부승지 호조참의 병조참의 거처 1721년(경종 1) 승지 충청감사 주청부사로 연잉군(延礽君 : 후에 영조)의 세제책봉을 승인받기 위해 청나라에 다녀왔다.
세제책봉을 허락받은 공로로 가자(정3품 통정대부 이상 품계를 올려줌)와 함께 노비 3구, 전(田) 10결을(쌀 20여 가마 해당) 하사받았으나, 청나 자문(咨文)에서 경종의 병약함을 발설했다는 죄목으로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파직 삼수갑산부에 위리안치 되었다.
귀양 가는 도중 그 고을을 지날 때마다 수령으로부터 접대와 선물을 많이 받아 싣고 가던 말이 무게에 못 이겨 넘어지는 일까지 생겼다.
윤양래를 호송한 의금부 도사는 동행하지 않고 따로 출발했으며 중간에 험준한 고갯길에서는 자신이 타고 가던 가마를 제공하기도 했다.
1722년(경종 2) 6월 20일 甲山 유배형을 선고받았으며, 갑산 유배를 소재로 하여 『북천일기』와 『갑극만영』을 편찬한 바 있다. 『북천일기』는 유배지로의 이동을 기록한 한문일기이며, 『갑극만영』은 유배지에서의 현실을 한시와 시조로 기술한 시문집이다.
영조가 즉위해 노론이 권력을 장악하자 1725년에 귀양에서 풀려나, 승지 공조참판을 거쳐 대사간 그 뒤 병조참판 안동부사 경기감사 도승지 한성 판윤 형조판서 공조판서 호조판서 등의 요직을 두루 거쳤으며, 1738년 경상관찰사 재임 시에는 시조(신달) 묘소를 심묘(尋墓)하였다.
1739년 대사헌 1743년 판돈령부사가 된 후 기로소에 들어갔으며 1746년 봉조하에 제수 받은 후 1751(영조 27)년에 향년 79세로 별세하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