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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태사공 윤신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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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태사공 윤신달

 

m01.png 시조(始祖) 태사공 휘 신달(太師公 諱 莘達)

 

m02.png 1) 시조 태사공(太師公) 약사

hj-hy.jpg시조 태사공은 신라천년사직이 무너지고 후3국 혼란기를 거쳐 이 나라가 재통일되는 역사적인 일대 변혁기에 탄생하여 마침내 왕건(王建)을 도와 삼한(三韓)을 통합하는데 큰 공을 세운 위인이시다.

918년 6월 태사공은 신숭겸(申崇謙), 홍유(洪儒) 등과 더불어 궁예(弓裔)를 무찌르고 왕건을 국왕으로 추대하여 백성의 호응을 얻으니 이로써 삼한을 통합한 고려왕조(高麗王朝)가 세워졌던 것이다.그때 신라는 귀족들이 부패하고 국왕의 난정(亂政)으로 곳곳에 도적떼가 날뛰니 각지에서 토호(土豪)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등 전국적인 동란기의 소용돌이 속에 빠져 있었다.

그리하여 신라는 국력이 극도로 쇠퇴하게 되었고 각처의 군벌은 반란을 일으켰다. 그에 따라 궁예는 개성에 후고구려를 세워 강원도·황해도 및 평안도까지 점령하였던 것이다.궁예는 그 뒤 철원으로 국도(國都)를 옮겼는데 왕건은 그 휘하에서 대장이었고 태사공은 왕건의 동료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궁예는 본래 천성이 잔인하고 횡포하여 폭정과 학살을 자행하니 민심은 완전히 이반되었다. 그리하여 태사공은 제장과 더불어 궁예를 물리치고 왕건을 국왕으로 추대한 것이었다.

 

궁예는 궁중에서 주색에 빠져 있다가 왕건이 쳐들어온다는 전갈을 듣고 왕건과 윤신달(尹莘達)이 함께 쳐들어온다 하니 나는 이제 절망이다 하면서 궁중을 빠져나가 도망치다가 강원도 평강 산골에서 백성들로부터 피살되었다 한다.왕건 태조는 등극과 함께 국호를 고려라하고 개성으로 도읍을 옮겼다. 그 뒤에는 신라는 자주 침범하는 후백제 견훤(甄萱)의 아들 신검(神劍)을 여러 차례 징벌한 사실이 있었는데 태사공은 그때마다 왕건 태조와 함께 출정하였던 것이다.

 

왕건 태조가 고려를 건국한 뒤 18년이 지난 935년에 신라의 경순왕 김부(金傅)는 태자 이하 모든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고려 왕건 태조에게 나라를 들어 투항하였다.왕건 태조는 투항해온 경순왕에게 왕녀를 하가(下嫁)시켜 별궁에 살게 하고 백관(百官)보다 상위(上位)로 우대하였다. 이어 왕건 태조는 서라벌에 동경(경주) 대도독부(大都督府)를 설치하여 대도독으로 하여금 신라 유민을 다스리게 하였다. 이듬해 왕건 태조는 끈질기게 반항한 후백제 신검을 정벌하여 항복을 받아내 드디어 삼국을 재통일하였으니 태조 19년(936)의 일이었다.

 

왕건 태조가 삼국을 통일하기까지 태사공은 항상 왕건에게 ‘인의(仁義)와 도덕으로 천하를 다스려야 이롭습니다.’라고 충간하였는데 왕건태조는 그 간언을 감동적으로 받아들였다고 한다.그러기에 후삼국 통일을 이룬 뒤에 조회 석상에서 왕건 태조는 중신들에게 ‘이 대업을 이루는데 윤신달의 공이 매우 크다’라고 유시하기까지 하였다 한다.

 

개국공신(開國功臣)으로 1등 5명, 2등 12명, 3등 10명, 4등 2명으로 모두 29명이 책훈(策勳)되었는데 태사공은 2등 공신으로 벽상삼한익찬공신(壁上三韓翊贊功臣)의 공호(功號)와 삼중대광태사라는 관작을 받았다.태사라는 관작은 태부(太傅), 태보(太保)와 더불어 삼공(三公)의 예우를 받는 최고의 직위이다. 이때 함께 공신으로 책훈된 인물 중에는 신숭겸(申崇謙 : 平山申氏 시조), 배현경(裵玄慶 : 慶州裵氏 시조), 홍유(洪儒 : 義城洪氏 시조), 복지겸(卜智謙 : 沔川卜氏 시조), 김선평(金宣平 : 신安東金氏 시조), 류차달(柳車達 : 文化柳氏 시조), 이도(李棹 : 全義李氏 시조), 장길(張吉 : 安東張氏 시조) 등이 있다.

 

공의 휘는 신달(莘達)이요, 시호는 소양(昭襄)이다. 신라 진성여왕 7년(893) 음력 8월 15일 파주 파평산 아래 용연에서 탄생하셨다.공은 파평산과 용연 부근에서 자라남에 따라 범상치 않은 풍모를 보이며 그릇과 재능이 뛰어나 날로 영특한 자품(姿品)을 갖추게 되었다. 공은 또 학문을 익히며 파평산에 올라 무술을 연마하고 성년이 되면서 어느 재상 댁에 문객으로 묵게 되었다. 마침 그때에 가뭄이 극심하여 곡식이 타죽게 되었다. 조정에선 기우제를 지내기로 결정하고 그 재상에게 제문을 지으라는 왕명이 내려졌다. 그 재상이 자택에 돌아와 제문을 지으려 하였으나, 서문이 생각나지 않아 고민하고 있었다. 그때에 태사공은 ‘이렇게 지으시면 어떠하리까’ 하면서 ‘군신이 죄를 지었으면 마땅히 벌을 받을 것이나 어찌 무지한 초목들을 태워버리려 하나이까(宜君臣之有罪 甘受愛災殃 奚草木之無知 等蒙焦熱)’이라고 써서 재상에게 제시하자 그 재상은 그 글귀를 보고 명문이라고 칭찬하면서 제문을 지어 국왕에게 바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태사공은 그 재상의 추천을 받아 여러 관직을 역임했다고 전해오고 있으나 자세한 문헌이 전해지지 않고 있다. 고려 건국 후 25년만인 서기 943년 왕건 태조가 승하하고 제2대의 혜종(惠宗)이 등극하였다.원래 동경대도독부와 서경(평양)대도호부에는 가장 신망이 큰 중신을 보냈던 것인데 혜종은 등극과 동시에 안심할 수가 없었던지 서경대도호부에는 가까운 왕족을 보냈고 동경대도독부에는 태사공을 부임케 한 것이다.

 

그때 태사공은 나이가 52세였다.태사공은 동경으로 부임하였으나 아드님인 공신공(功臣公)은 종신토록 개성을 떠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태사공이 동경대도독으로 부임하여 30년간 재임하다가 81세에 서거하였는데 그 사이에 부자께서는 한 번도 상면할 기회가 없었다고 한다. 신라 경순왕이 투항할 때 마의태자와 중신들이 강력하게 반대한 것이므로 신라 백성들 가운데 고려에 대하여 불복하고 반항심을 가진 사람이 적지 않은 실정이었다. 그런데 《고려사》 기타 어느 문헌에도 신라유민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사적 기록이 전연 없다. 그것으로 미루어 보아 태사공이 대도독으로 부임하여 신라 유민을 통치하는데 있어서 얼마나 훌륭한 왕도정치, 곧 도의정치를 베풀었는지 그 선정(善政)의 정도를 헤아리고도 남음이 있다고 본다.

 

그 뿐 아니라 조정에서도 태사공으로 하여금 30년이나 유임케 한 것은 태사공의 통치가 목민(牧民) 위주의 정치였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본다.태사공 묘소가 실전되었다가 여러 100년이 지나서 되찾았는데 그 지방민들로부터 그곳이 윤능골(尹陸골)이라고 한다는 전언이 단서가 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신라 유민들이 태사공의 덕치(德治)에 감동되어 마치 왕처럼 섬긴 까닭이라고 보아진다. 태사공이 30년 동안 신라 유민을 잘 다스려 온전하게 고려의 충성된 백성으로 감화시켰기 때문에 공이 서거한 지 10년 후 성종(成宗) 2년 대도독부를 폐지하고 각 군을 그 고을 수령에게 맡기고 경주 1개군만 다스리는 동경유수(東京留守)를 두도록 직제를 개정하였던 것이다.

 

공이 고려 광종(光宗) 24년(973) 임지에서 서거하니 향년 81세였다. 묘소는 포항시 북구 기계면 봉계동 운주산(雲住山) 구봉산(九峰山) 아래 유원(酉原)에 모셔졌는데 중간에 실전되었다가 영조 때 심묘하여 다시 봉축하고 영조 16년에 비를 세웠다.배위 묘소에 대하여는 봉강재 소장의 태사공심묘기에 경주 남면 봉동산 아래 박달리(朴達里) 감룡자좌오향득수진파동서분(坎龍子坐午向得水辰破東西墳)으로 모시고 비석을 묘 아래에 묻었다고 전하나 태사공묘 표기 및 묘지에는 합장되었다는 기록이 있어 앞으로 밝혀져야 할 숙제로 남아 있다.

 

m02.png 2) 시조 태사공 묘표 해설

hj-hy.jpg아아! 여기는 파평윤씨의 시조 고려의 태사 휘 신달의 묘소이시다. 태사공께서 처음에 파평에서 나셔서 고려의 태조대왕을 도와 삼한을 통합하여 공신이 되시고 벼슬을 태사 삼중대광이시다. 돌아가신 뒤 여기에 장례 모시니 즉 경주 기계현 벌치등(현 영일군 기계면 봉계리) 구봉산 아래 유좌(정서방)의 언덕이다. 무덤 앞에 옛날에 표석이 있었는데 투장한 사람이 깨어 헤쳐서 숨겼기 때문에자손들이 드디어 그 무덤 있는 곳을 잃어버렸다. 간혹 전기와 전하는 말을 족보에 실리기는 했으나 또한 상고할만한 것이 없으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후손 이(理)가 경주부윤으로 있을 적에 찾아다니다가 얻지 못하였고 지금 임금(영조) 13년(정사)에 봉정(鳳廷)이 영장(營將)이 되어 이 지방 사람들이 모두 이곳을 가리켜 윤태사의 무덤이라는 말이 들리기에 이에 바로 묘하에 가서 근처의 흙을 파서 부서진 빗돌 한 조각에 “대부윤(大夫尹)”이라고 크게 새겨진 석자를 얻었다.

 

이에 종중 사람들이 모두 솟아오를 듯이 기뻐하기는 하나 혹은 석자 가지고는 오히려 족히 확증할 만한 것이 못된다고 염려하였다. 그러다가 이(理)의 아들 판서 양래(陽來)가 본도(경상도)에 부임하여 병정을 더 내어 무덤의 좌우를 두루 파헤치며 칠일동안 수색하여 또 “선지금강(先之金剛)”이라고 작게 새겨진 네 글자로 된 것 한 조각을 얻었다. 그런데 이는 곧 공의 아들 삼한 공신과 손자 좌복야 양세의 휘자이시다. 묻힌 돌의 자획이 앞서 얻은 것과 크고 작기는 하나 실로 서로 비슷한 것으로 보아 큰 글자는 전면의 표기이고 작은 글자는 후면의 음기임을 가히 짐작할 수가 있으니 그런즉 이곳이 태사공이 묻혀 계시다는 것을 의심치 않게 되었다.

 

모든 우리 윤씨 성을 가진 자가 기이하고 다행하게 생각지 않는 이가 없어서 서로 경사스럽게 여기었다. 이에 혜교(惠敎)가 양래와 부사 동설(東卨)과 승지 휘정(彙貞)과 현령 사도(師道)와 참판 용(容)으로 더불어 꾀하여 이르기를

“우리 시조의 성하신 덕과 위대한 공으로 해서 대대로 계승하여 이제까지 거의 천년에 이르고 조선조시대에 들어와서 네 분 국모가 탄생하셨으니 더욱 성하였다. 그런즉 산소에 대한 일을 마땅히 삼가고 지켜서 틀리지 않도록 해야 하거늘 중간에 잃었고, 한번 잃은 것은 찾기가 대단히 어려운데 이제 또 찾았으니 이 어찌 때때로 밝았다 어두웠다 하는 수가 있고 또한 음으로 도와주는 것이 있지 않느냐. 이것을 이어서 빠지고 없어진 것을 보충하고 마련해서 오래도록 영구하게 전할 것을 도모하는 것은 우리 후손들에게 달려 있다” 하고서 드디어 팔도에 흩어져 사는 후손들에게 두루 알려서 각각 힘을 모아 도우도록 하였다. 마침 휘정이 이 고장을 지키게 되어서 이에 이 일을 도맡아보게 되었고 돌을 깎아서 이 산소의 모든 것을 표하게 되기에 혜교가 간략하게 그 사적만을 기록한다. 공의 언행과 사업 같은 문헌이 증거 할 수가 없다. 후손들은 번성해서 나라 안에 널리 퍼져 있어서 기록할 수가 없다.

25대손 이조판서 혜교(惠敎)는 삼가 기록하다.

24대손 경주부윤 휘정(彙貞)은 삼가 쓰다.

 

무오년에 봉분을 개축할 적에 제전으로 한 섬지기를 마련하여 문권(등기)은 본부지통에 넣어 두었다. 해마다 시월 상순에 제사를 지내고 자손들 중 경주에 사는 이를 주장케 하고 무덤 아래 묘지기가 없었으며 기명과 의물이 하나도 갖춤이 없었다. 나무꾼과 소먹인 이를 금하지 못하고 향사함이 경건하지 못했다. 신미년에 후손 광소(光紹)가 안동을 지키게 되어서 분암과 재실을 국내 왼쪽에 창건하고 중들을불러 지키게 하였고 또 제기와 의물을 갖추고 품식을 정하여 향사에 쓰인 그릇과 물건을 재실에 간직하여 두고 자손이 이 고장의 수령된 이들이 또한 도우니라.

 

임신(壬申)에 후손 동도(東度)가 본도를 살피게 되어서 더욱 더 수호하는데 치중하니 숭상하여 받드는 소리 비로소 한이 없는지라. 살피건대 남원윤씨 족보에 이르되 시조를 연못 위에서 얻었다 한 것은 아마 전설에 파평 용연리에서 노파가 석함을 얻었다는 말에 근거하나 일이 허망하고 괴상하여 이에 실려 기록하지 않는다.

 

다만 속된 전설의 말단에 공의 겨드랑 왼쪽과 오른쪽에 여든 한 개의 비늘이 있고, 두 어깨에 붉은 사마귀가 있어 해와 달이 그려지고, 발에 일곱 개의 검은 점이 있으므로 혜종(惠宗)께서 제위에 오름에 공의 얼굴이 비상하다 하여 내보내어 동경(현 경주) 유수를 삼고 마음속으로 꺼리고 마침내 소환치 않으니 임소에서 돌아가시니 이러므로 묘소를 경주에 모셨다 이르니라. 전설에 석함이 당나라 소종 경복 계축년 팔월 십오일에 나왔다 이르니 후손의 사사 기록이라 송나라 태조 개보 육년 계유에 돌아가시니 수하신 나이 여든하나이시다.

 

m02.png 3) 시조공의 탄강설

경기도 파주시 파평산(京畿道 坡州市 坡平山) 기슭에는 아득한 태고(太古)적부터 큰 연못이 있어 용연(龍淵 : 一名 가연(嘉淵))이라고 부르고 있었는데, 전설(傳說)에 따르면 이 못 속에는 용인(龍人)이 살고 있어 연못가가 불결해지면 뇌성(雷聲)이 진동하고 풍우(風雨)가 몰아친다고 전한다.예부터 우리 종중(宗中)에 전해오는 가첩(家牒) 언전(諺傳) 및 그밖의 문헌(文獻)에 의하면 지금으로부터 1111년 전 즉, 신라 진성여왕(眞聖女王) 7년(서기 893년) 계축(癸丑) 음력 8월 15일 용연(龍淵) 위에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게 끼고 요란하게 천둥과 번개가 치면서 연못 위에 한 옥함(玉函)이 떠올랐는데 마을 사람들이 기이(奇異)하게 여기어 고을 태수(太守)에게 고하여 태수(大守)가 연못가에 나가보니 옥함(玉函)이 떠올랐다가 연못 복판으로 밀려들어가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날이 저물 무렵 연못가에서 이날따라 빨래를 하던 한 노파가 옥함(玉函)이 다시 떠오르는 것을 보고 이를 건져내어 열어보니 그 속에 5색(色)의 우모(羽毛)에 쌓인 어린 사내아이가 들어 있었다.

 

이 옥함(玉函)에 관해서 일부 문헌(文獻)에는 석함(石函)이라고 기록하고 있고 태사공(太師公) 묘지(墓誌)에는 금궤(金櫃)로 되어 있다.찬연한 서기(瑞氣)를 발산하면서 옥함(玉函)에서 나온 사내아이는 융준용안(隆準龍顔)의 상(相)으로 코가 우뚝하여 용(龍)을 닮았고, 양쪽 어깨에는 붉은 사마귀가 있어 일월(日月)모양이었으며 좌우 겨드랑이에는 비늘이 81개가 돋아 있었고, 발에는 7개의 검은 점이 있어서 북두칠성(北斗七星)의 형상과 같았으며, 온몸에서는 광채가 솟아나와 눈을 부시게 하였으니 이 어른이 바로 파평윤씨(坡平尹氏)의 시조(始祖)이시다. 그런데 우리 시조(始祖) 태사공(太師公)이 득성(得姓)하신 연유에 관해서 종중(宗中)에서 전해오는 바에 의하면 옥함(玉函)을 건져낸 윤(尹) 노파의 성(姓)을 따라 윤성(尹姓)이 되었다고 전하나 가첩(家牒) 및 그밖의 문헌(文獻)에 따르면 옥함 자체에 윤자(尹字)가 새겨져 있었기 때문에 윤성(尹姓)이 되었다고도 하며, 또한 옥함에서 나오실 때 손바닥에 윤(尹)이란 글자가 뚜렷이 나타나 있었다고도 전한다. 태사공의 휘(諱)는 신달(莘達)이라고도 전(傳)해지고 있다.

 

1. 윤씨 일람표(尹氏一覽表)

본관

시조

시대

공신·작위

계·사·직

(階·司·職)

비 고

파평

(坡平)

신달

(莘達)

고려

벽상삼한

익찬공신

(壁上三韓)

(翊贊功臣)

삼중대광태사

(三重大匡太師)

남원

(南原)

위(威)

고려

남원백

(南原伯)

서경유수

(西京留守)

파평 태사공 8세로 분본 지금은 통합.

함안

(咸安)

돈(敦)

고려

함안백

(咸安伯)

문하시중

(門下侍中)

파평 태사공 10세로 분본 지금은 통합.

덕산

(德山)

은형

(殷衡)

고려

덕산군

(德山君)

합문지후

(閤門祗候)

파평 태사공 9세로 분본 지금은 통합.

신령

(新寧)

인직

(仁直)

고려

화산군

(花山君)

동북병마사

(東北兵馬使)

파평 태사공 8세로 분본 지금은 통합.

야성

(野城)

혁(赫)

고려

야성군

(野城君)

금자광록대부

(金紫光祿大夫)

파평 태사공 14세로 분본 지금은 통합.

칠원

(漆原)

시영

(始榮)

신라

태자 태사

(太子 太師)

신라 태종무열왕 태사 역임.

거부

(鉅富)

고려

칠원백

(漆原伯)

호장

(戶長)

세계 실전으로 거부를 시조로 함.

해평

(海平)

군정

(君正)

고려

수사공·좌복야

(守司空·左僕射)

원 조 ( 遠 祖 )는 문 하 시 중 ( 門下侍中) 신준(莘俊)이라 함.

무송

(茂松)

양비

(良庇)

고려

보승 낭장

(保勝 郎將)

경(鏡)이 중국에서 지금 전북 고창(高敞)에 망명.

해남

(海南)

존부

(存富)

고려

세계 실전으로 광전(光琠) 을 중시조(中始祖)로 모심.

해주

(海州)

광전

(光典)

고려

사온서직장

(司醞署直長)

고려가 망한 뒤 해남에서 숨어 살았음.

해주

(海州)

중부

(重富)

고려

지중추

(知中樞)

본을 서흥(瑞興)이라 하기 도 함.

예천

(醴泉)

충(忠)

고려

추밀부사

(樞密副事)

예빈시소윤(禮賓寺小尹)에 증직.

기계

(杞溪)

유정

(維禎)

고려

합문지후

(閤門祗候)

기계(杞溪)는 경북 영일군 (迎日郡)에 있음.

현풍

(玄風)

보은

(輔殷)

시조가 보형(輔衡)이라는 설도 있음.

죽산

(竹山)

정화

(挺華)

고려

전객시령

(典客寺令)

고창

(高敞)

세보

(世寶)

고려

대장

(隊長)

평산

(平山)

번(璠)

고려

군기감

(軍器監)

영천

(永川)

절생

(切生)

고려

호장(戶長)

조선조때 낙안군수(樂安郡 守)를 시조라 하기도 함.

수안

(守安)

명의공

(明義公)

고려

내사랑

(內史令)

삼한공신()三韓功臣

여주

(驪州)

달(達)

조선

판관(判官)

달(達)을 달신(達莘)이라 하기도 함.

덕풍

(德豊)

여징

(汝徵)

조선

부사(府使)

주천

(酒泉)

대형

(大衡)

조선

감찰(監察)

청주

(淸州)

취(就)

조선

현감(縣監)

경주

(慶州)

통(統)

조선

참판(叅判)

양주

(楊州)

숭(崇)

고려

첨의정승

(僉議政丞)

 

2. 묘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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