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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은 전서공(典書公) 시(恃)의 셋째 아드님으로 조선조(朝鮮朝) 태종(太宗) 14년 갑오(甲午 : 서기 1432)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시고, 통례원봉례랑(通禮院奉禮郞) 과천현감(果川縣監)에서 교체되어 서울로 돌아올 때, 박강생(朴剛生)과 금천현감 김문(金汶) 등이 공(公)을 안양사(安養寺)에서 전별(餞別)하였더니
김문(金汶)이 약주(藥酒)에 상(傷)하여 갑자기 죽었다. 이때에 이르러 발각되어 사헌부(司憲府)에서 죄를 청하니 임금이 술을 권하는 것은 본시 사람을 죽이고자 함이 아니고 인관(隣官 : 이웃 동관)을 전벌함도 또한 상사(常事)인 것이라 하고 불문에 붙이다.
이때 각도에 기근이 들었는데 창고가 거의 비어 임금이 크게 염려하여 경차관(敬差官)을 각도에 나누어 보냈는데 공은 평안도 경차관으로 가셔서 돌아와 계하기를 본도 44읍에 굶주리는 백성이 4만 5백 명이라고 보고할 정도로 어려운 세상이었다.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를 역임하셨고 후에는 이조판서(吏曹判書)로 추증(追贈)되셨다. 배(配)는 순천박씨(順天朴氏)로 감찰(監察) 집(楫)의 따님이시다. 원래(元來) 묘소는 의정부 신공동 산(山) 30-1 갑원(甲原)에 모셨으나 국가토지수용령(國家土地收用令)으로 배위(配位) 묘역(墓域) 내로 이봉(移奉)하였으므로 새로 재실(齋室)도 마련하여 태위공(太尉公) 이하 실전(失傳)된 선조님 단소(壇所)를 마련하여 음력 10월 7일 시향(時享)을 지내다.
※ 박강생(朴剛生) : 밀양인 수원부사로 있을 때 공과 친분이 두터웠다. 태종대왕실록(太宗大王實錄) 제33권(卷). 윤5월 초4일에 기록되었음
교리공 묘표(국역)
교리공의 휘는 돈(惇)이니 이조판서를 증직 받았다. 묘는 본래 양주 남면 동오리 송산 갑원에 있었는데 지금까지 500여 년이 되었다. 근래 도시개발로 인해 부득이 적성 노곡방 적대촌 뒷산 묘원으로 옮겨 배묘와 동원이나 상단에 모셨다. 묘역을 이전함에 표석이 없을 수 없어 여러 후손들이 상의하여 석물을 세우게 됨에 나에게 그 비문을 부탁하거늘 내가 심신이 심히 노쇠했지만 후손으로서 사양할 수 없었다. 그러나 세대가 오래되어 사적이 인멸되었으며 또 집안의 기록도 소략하여 그 드러난 공덕과 생졸의 연대를 자세히 상고할 수 없으니 공자께서 문헌이 부족하여 기와 송의 사적을 징험할 수 없다고 탄식하신 것과 다를 바 없도다. 이에 간략히 계보를 기록하노라.
우리 윤씨 집안은 파평에서 시작하였는데 그 시조는 고려 태사공으로 벽상공신을 지내신 휘 신달(莘達)이시다. 문숙공 휘 관(瓘)께서는 여진 오랑캐를 평정하고 국경을 개척하여 진국공신에 봉해졌으며, 문강공 휘 언이(彦頤)께서는 훈업과 문장이 역사에 크게 드러나셨다. 교리공의 고조 휘는 안비(安庇)니 태위 문하시랑을 제수 받았으며, 증조는 휘 침(忱)이니 평리 영평군에 봉해지셨다. 조부인 휘 인선(仁善)은 상서좌복야를 제수 받으셨고, 아버지의 휘는 시(恃)이니 문 전서를 제수 받으셨다. 어머니는 남양홍씨로 대언을 지낸 흥(興)의 따님이고 배위는 군부인 순천박씨로 감찰을 지낸 즙(楫)의 따님이시다. 슬하에 2남을 두었는데 장남 복흥(復興)은 양자로 보내졌고, 차남인 계흥(繼興)은 삼척부사를 지내셨다. 손자인 석(晳)은 사간을 지냈고, 구(昫)는 부사정을 지냈다. 증손과 현손은 번다하여 기록치 않는다. 후손들이 번창하여 집안의 아름다움을 이어 현달한 이름과 덕이 계속되어 이분이 남긴 은택을 가히 징험할 수 있으니 이로써 묘표를 짓노라.
19대손 종율(鍾律)은 삼가 짓다.
의성 김진구 삼가 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