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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은 판서공(判書公) 돈(惇)의 아드님이시고 전서공(典書公) 시(恃)의 자손(子孫)이시다. 태위공(太尉公)의 오대손(五代孫)이시다.
공은 삼척도호부사(三陟都護府使)로 계실 때 단종(端宗) 6년 계유(癸酉) 정난원종공훈(靖難原從功勳)에 기록(記錄)되었으며 의정부좌찬성(議政府左贊成)으로 추증(追贈)되었다.
배(配)는 영천이씨(永川李氏)인바 부(父)는 우찬성(右贊成) 승손(承孫)이시다. 왕(王)은 교서(敎書)를 내리기를 공(功)을 기록하고 상(賞)을 주는 것은 나라의 아름다운 법이다. 내가 부족한 덕으로 외람되게 대위(大位 : 임금 자리)에 앉았는데 잠저(潛邸 : 임금이 되기 전 집)에서의 어려울 때를 회고하니 덕이 같은 신하들이 전후좌우에서 과인을 보호하였기 때문에 혹은 나의 동열(同列)로서 혹은 나의 요좌(僚佐)로써 혹은 가까운 친척으로서 혹은 오래 수종(隨從)하던 사람으로서 혹은 내가 중국에 갈 때에 발섭(跋涉 : 산을 넘고 물을 건너)의 노고를 함께 하였고 혹은 정난(靖難)에 참여하여 방위(防衛)에 힘쓰고 아래로 복예(僕隷)에 이르기까지 힘을 다하였으니 모두 원종(原從)의 공(功)이 있어서 오늘의 아름다움에 이르렀으나 내가 감히 잊겠는가? 마땅히 먼저 포상(褒賞)을 하는 법을 보여서 처음부터 끝까지 변하지 아니하는 의리를 굳게 하려고 한다 라고 세조(世祖)는 의정부에 명하여 거행하니 자손들에게는 음직을 받게 하고 자급(資級)씩 추증(追贈)하다.
공께서도 정난원종공신에 기록(記錄)되어 추증(追贈)된 것입니다.(조선왕조실록 세조실록 2권에 기록됨)
묘는 아버님 묘 앞에 합장되어 있음.
부사공 묘표(국역)
선대의 사적을 뒷날 징험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보승에 기록된 것뿐이거늘 보승이 소략하면 장차 어디서 그 상세한 내력을 얻을 수 있으리 오마는 이 에 삼가 간략히 기록하노라.
파평윤씨 고려 태사공 벽상공신 휘 신달(莘達)이 시조이시다. 태사공의 현손 휘 관(瓘)은 시호가 문숙이니 북쪽 국경을 개척하여 진국공신에 봉해지셨고, 내손(來孫)이신 휘 언이(彦頤)는 시호가 문강으로 훈업과 문장으로 고려의 역사에 크게 드러났다. 조선에 들어와서 아버지인 휘 돈(惇)은 태종조에 홍문관 교리를 지내셨고, 어머니인 군부인 순천박씨는 감찰을 지낸 즙(楫)의 따님이다. 배위는 영천이씨니 우찬성을 지낸 승손(承孫)의 따님이다. 슬하에 5남 1녀를 두었는데 장남 석(晳)은 사간을 지냈는데 연산군 갑자년에 직간을 하다가 천양지화를 당하셨고, 차남 구(昫)는 부사정을 지냈으며, 삼남 질(晊)은 첨사를 지냈고, 사남 환(晥)은 양자를 갔으며, 오남 준(晙)은 도사를 지냈다. 따님은 원자영에게 출가하였다. 손자인 인저(仁著)는 생원을 지냈고, 인복(仁復)은 서천군수를 지냈으며, 인경(仁鏡)은 영의정을 지냈고, 인형(仁亨)은 통정에 봉해졌으며 그리고 인택이 있다. 증손과 현손은 번다하여 기록치 않는다. 적성군 노곡방 적대촌 뒷산 언덕에 이장함에 배위는 영천이씨와 합장하였다.
후손들이 잇고 이어 남기신 큰 뜻을 바꾸지 않고 통서(統緖)를 드리웠으니 이에 묘표로 기록하여 후세에 전하노라.
18대손 종율(鍾律)은 삼가 짓고 의성 김진구 삼가 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