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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윤공 휘 이 묘표(국역)
옛날의 적성 적대리는 지금의 연천 노곡리인데 그 곳의 인원은 나의 십대 종조고이신 부윤공과 배부인을 면례하고 합장한 곳이다. 본디 묘는 옛날 양주군에 속해 있던 두천 동오리 같은 산 다른 언덕에 위치해 있었는데 수년 전 도로 확장으로 인해 배위의 묘를 면례하여 부군의 묘와 합쳤더니 또 그곳이 택지가 개발됨으로 인해 무인년 겨울에 이곳에 옮겨 모시게 되었다. 부군의 성은 윤이고 휘는 이요 자는 자일이시다. 우리 파평윤씨는 고려조 태사를 지내신 휘 신달을 초조로 하고 있는데 대대로 공경의 벼슬이 이어져오다가 문숙공 휘 관과 문강공 휘 언이에 이르러서는 그 훈업이 고려 국사에 빛나고 있다.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휘 인경은 영의정을 지냈는데 시호는 효성으로 관이 인신(人臣)의 극에 달하였으니 부군에게는 5대조가 된다. 부군의 고조는 휘가 현이니 절제사를 지냈고, 증조의 휘는 사흠이니 수사를 지냈으며, 조부의 휘는 영이니 사어를 지냈고, 이조참판에 증직되었다. 어버지의 휘는 지선이니 이조판서에 증직되었고 어머니는 전의이씨로 정부인에 추증되었다. 부군의 외조부의 휘는 종택인데 참봉을 지냈다. 공은 숭정 병사년 10월 14일에 태어나셨는데 5형제 중 막내였다. 도승지와 경주부윤을 지내셨고 보사공신(保社功臣)에 책록 되었으며 의정부 좌찬성 홍문관 예문관 대제학에 추증되었다. 배부인은 흥양이씨로 정경부인에 추증되었는데 그 아버지의 휘는 의윤이다. 슬하에 5남 2녀를 두었는데 장남 창래는 사응원 첨정을 지냈고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차남은 석래인데 병조참판을 지냈고 삼남은 익래인데 진사였으며 사남은 양래인데 품계는 보국숭록대부였고 판돈령의 직임으로 치사하여 봉조하에 들어갔으며 시호는 익헌이다. 오남은 원래이다. 장녀는 부사를 지낸 진주 강태상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생원시에 장원한 광주 이현명에게 시집갔다. 손자인 명언은 큰집의 양자로 가서 동지중추부사를 지냈고, 택언은 둘째 집의 양자로 갔으며 섭언은 셋째 집의 양자로 가서 음직으로 첨지중추부사가 되었다. 지언은 넷째집의 양자로 가서 현령을 지냈고 통정의 품계에 추증되었다. 빈언은 끝집의 손자이다. 부군은 숙종 갑술년 6월 초하루에 돌아가셨고 배부인은 을묘년 10월 30일에 돌아가셨다.
삼가 족보를 살펴보니 권수암 상하가 지은 묘표에 공은 덕과 기운이 충일하여 바라만 보아도 거인장자임을 알 수 있었고 마음이 넓고 곧아서 영욕을 얻고 잃음에 초연하였다고 했으니 이로 보건대 부군의 평소의 삶이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다. 또 정승을 지낸 유척기가 지은 묘문이 묘 앞에
서 있었으나 지금은 여러 선조의 묘소를 동시에 면례하면서 지형지세로 인해 옛 비석들을 역내의 한 곳에 모아 나란히 세워놓아 후세에 참고할 수 있게 하고 새로운 묘갈을 묘전에 세우는데 부군의 십대손인 종균과 정균 두 종항이 뜻을 합쳐 나에게 와서 글을 청함으로 삼가 오른쪽과 같이 서술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