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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복첨정공 휘 수정 묘표(국역)
공의 휘는 수정이요, 자는 공거니 파평윤씨 시조 고려 태사공 휘 신달의 28세손이다. 윗대의 계보는 선대 묘문에 기록되어 있고 조선조에 와서 휘 돈은 태종조에 문과하여 홍문관 교리를 지냈고 이조판서로 추증되었다. 휘 인경에 이르러서는 영의정이 되어 효성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니 공의 9대조이다. 고조의 휘는 리이니 도승지와 경주부윤을 지냈으며 보사공신에 올랐고 좌찬성과 양관 대제학에 추증되었다. 증조의 휘는 창래니 사옹원 첨정을 지냈고 이조참의에 추증되었다. 조부의 휘는 명언이니 동지중추를 지냈고, 아버지의 휘는 면승이니 문과하여 대사간을 지냈다. 어머니는 기계유씨니 영조 병자(1756)년에 공을 낳았다. 공은 정조 계묘(1783)년에 진사가 되었고 사복첨정에 올랐다. 배위는 덕수이씨니 현감을 지내고 이조참의로 추증된 휘 숙(潚)의 따님이다. 2남 1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희대(希大)로 군수를 지냈고 비서승에 추증되었다. 차남은 재대(在大)니 생원이다. 따님은 광산김씨 기후의 전실이다. 손자 유성(維成)은 내부협판을 지냈고 세 딸을 두었는데 장녀는 좌상을 지낸 평산 신용조에게 출가하였고, 차녀는 영의정 안동 김병학의 전실이며, 삼녀는 부사 안동 김석근의 전실이었다. 장방출은 종성이고 계방출과 증현손 이하는 다 기록치 않는다.
묘는 적성 지금 연천 노곡리 적대산 교리공 배위 정부인 순천박씨 묘앞 을원에 합장하였다. 불행히도 일찍이 순천박씨 할머니의 묘를 실전하였더니 영조 때 공이 최씨 성을 가진 산지기의 도움으로 다시 찾아 봉분을 짓고 수호하여 지금까지 이르렀다. 공이 세월이 오래되면 다시 찾아 봉분을
짓고 수호하여 지금까지 이르렀다. 공이 세월이 오래되면 다시 전일의 잘못이 있을까 두려워하여 이곳을 집안의 신후지지(身後之地)로 삼을 것을 명하였다. 아, 공의 여타 행적이 응당 많을 터이나 증거 할 수 없고 혹 틀린 행적이 기록될까 두려워 번다히 기록치 않는다. 묘비가 아직 없었더니 6대손 종균과 정균 형제가 찾아와서 나에게 비문을 청하므로 사양했으나 할 수 없이 승낙하고 우(右)와 같이 기록하노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