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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용연(龍淵)
태사공께서 옥함을 타시고 이 연못에 떠있는 것을 윤씨할머니〔윤온(尹)〕가 건져서 양육하였다고 전해오고 있다. 그러므로 예로부터 “윤씨(尹氏) 연못”이라고 일러오고 있는데, 수호전(守護田) 1500평으로 관리인을 두어 수호하고 있다.
이 연못이 훤히 열려 있으면 윤씨가 번창하고 점점 메이면 윤씨가 쇠한다는 말이 있고, 또 용연을 준설(浚渫)하는 후손은 현달(顯達)한다는 전언(傳言)이 있으니 예부터 종종 준설해온 것으로 추측되나 기록은 찾을 수 없다. 근대에는 1920년에 강화 종중에서 준설하고 『파평윤씨 용연(坡平尹氏 龍淵)』이라는 비석을 세우고 그 후 1961년 파평윤씨대종회에서 다시 준설하였으나 예산 관계로 말끔히 보수하지는 못하였다. 그 연못 주위는 초장(草場)이었는데 1976년 3월 태위공(太尉公)파 풍산(豊山) 종중(宗中)에서 수양버들 150주(株), 은행나무 6주, 벚나무 5주를 심어 조경하였다.
용연은 예부터 “윤씨 연못”으로 공칭(公稱)되어 왔으나 1918년경의 세부측량 당시에 우리 소유로 신고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시 국유로 편입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일정(日政) 당시에 파주읍에 거주하는 노모(魯某)가 개답(開畓)하기로 허가를 받은 것이 발각되어 우리 중종에서 소송을 제기하여 승소하고 비로소 지적대장(地籍臺帳)에 “윤씨연(尹氏淵)”이라고 표시하도록 하였다. 용연은 원래는 광대한 연못이었다고 추측되나 유구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주위에서 침간(侵墾)하여 현재는 지적도에 2,531평으로 기재되어 있는데, 1977년 1월 14일 대종회에서 종중소유로 소유권 이전등록을 완료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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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치마대(馳馬臺)
치마대(馳馬臺)에는 공(公)께서 훈련하시다가 타고 다니시던 애마(愛馬)가 죽자 다섯 개의 철마(鐵馬)를 만들어 놓으셨다는 전설이 있는데, 그 후 어떤 철공(鐵工)이 이 철마들을 무심코 훔쳐갔다가 즉사하였다 한다. 그 때 같이 갔던 사람이 겁을 먹고 후에 그 자리에 흙으로 역시 다섯 개의 토마(土馬)를 구워놓았으나 그 모양이 아주 작아서 말 같지 않았다고 하나 지금은 흔적도 없다.
태사공 휴허지 금강사(金剛寺) 일대야말로 우리 파평윤씨의 정기의 진원지나 다름없는 성스러운 터전으로 최근 현지답사를 통하여 사지가 확인되었고, 마타사와 대한불교 조계종 총무원에 보존된 문헌·전적으로 미루어 비로소 고증을 굳히게 되었다. 한편 미타사 경내의 우물에는 석불(石佛)이 모셔져 있고 미타사 옆 석벽에는 평평산 주신(主神)으로 호랑이를 타고 있는 태사공을 모셔 음각해 놓았고, 나한전에는 무관복을 입고 계시는 문숙공의 영전을 오늘날까지 모시고 있는 광경을 보면 후손으로서 더욱 숙연한 감회를 자아내게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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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봉강재(鳳岡齋)
실전한 묘소를 찾은 뒤 그 다음해 이조판서(吏曹判書) 혜교공(惠敎公), 경상감사(慶尙監司) 석래공(錫來公), 경주부사(慶州府使) 동설공(東卨公), 승지(承旨) 휘정공(彙貞公), 현령(縣令) 사도공(師道公), 참판(判) 용공(容公) 등 제위가 상의하여 널리 종문에 통보하고 태사공의 묘역을 다시 봉축(封築)하는 동시에 묘비〔25대손 판서 혜교찬(惠敎撰) 24대손 부윤(府尹) 휘정서(彙貞書)〕 기타 석물(石物)을 갖추고 제전(祭田) 일석(一石) 지기를 마련하여 해세(每歲) 10월 10일(지금은 10월 1일)에 시제(時祭)를 봉행(奉行)하기로 결정하였다.
10여 년이 지난 1751년 신미에 27세손 광소공〔光紹公:지돈녕(知敦寧)〕이 안동부사로 부임하여 분암〔墳庵:봉서암(鳳棲庵)〕과 재사(齋舍)를 창건하고 승려에게 묘역을 수직(守直)케 하는 현편 제기의물(祭器儀物)도 완비하였다. 그때에 광소공(光紹公)은 철문(鐵文) 50양(兩), 재목(材木) 15간(間), 제사용 기물 일체를 자담하였고, 경상감사로 부임한 26대손 동도공(東度公:후에 영의정)이 철문 80양, 위토 일석(一石) 지기(240양), 정조(正祖) 180석 등을 헌납하였으며, 그 외에 후손들의 많은 성금이 있었다. 그리고 그 뒤로부터는 경상도 지방에 수령으로 부임하는 후손들은 반드시 위토(位土)를 헌납하게 되어 많은 위토가 마련되었다.
1833년 봉강서원(鳳岡書院)을 창건하여 태사공의 위패를 봉안하고 춘추로 제향을 드리다가 대지가 협소하여 1846년에 산 너머 치동(治洞)으로 이축(移築)하고 1857년 다시 증축하여 민진원(閔鎭遠)·김창집(金昌集) 이공(二公)을 추배(追配)하였다. 그러나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하여 훼철되고 그 자리에는 유허비(遺墟碑)를 세웠다. 그때에 재사(齋舍)뒤에 별묘를 새로 짓고 태사공의 위패를 이안(移安)하여 현재까지 청명일에 춘향(春享)을 드리고 있다. 봉서암은 서원을 창건할 당시에 폐사(廢寺)되었을 것으로 추측되나 자세한 기록은 찾을 수 없고 현재 현액(懸額)만 남아 있다. 심묘후(尋墓後) 300여 년 동안 누차 재사의 중수(重修)가 있었으며, 그 기록이 봉강재에 보관되어 있다. 근대에 이르러서는 1935년 재사가 심히 퇴락되어 당시의 봉강재 도유사(都有司)인 31세손 석훈공(奭勳公)의 노력으로 대구 경보(經普), 청송 용구(鎔求), 부산 소득(小得), 영해 경목(敬穆) 등 제공(諸公)의 거액성금과 기타 전국 각 종문의 성금으로 크게 개증축 하였다.
그 다음은 1973년 봉강재 회장에 취임한 두상씨(斗相氏)가 주관하여 대구 종문의 거액 성금 및 전국 종문의 성금으로 봉강재 입구의 차도를 확장하는 동시에 재사 전체를 보수하였고 전기 전화를 가설하여 면모를 완전히 일신하였으며, 1979년에는 첨체종인(體宗人)의 숙소 겸 회의실로도 겸용할 수 있는 회관을 신축하였다.
그 후 1993년 대구의 태균(泰均)씨가 회장이 되어 1971년 석훈 회장 때에 32세손 구보(龜普)씨의 성금으로 신도비를 건립하였으나 비신(碑身) 규격이 태사공의 작훈(爵勳)에 맞지 않으므로 태균 회장이 비용을 독담하여 명실상부한 신도비를 새로 건립하였고, 도로에 편입된 산판 매각대금으로 회장실을 신축하였으며, 경북도청과 영일군에 신청하여 문화재(1988년 지정) 보수비 2억여 원을 배정받아 경역(境域) 전부를 재보수하여 더욱 면모를 쇄신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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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상서대(尙書臺)
문숙공께서 여진정벌을 마치시고 개선하셔서 별저로 쓰시던 곳이며, 장내(墻內)에는 친히 식수하신 괴목(槐木) 수주(數株)가 있었다 하며 상서대 옆에는 못이 있어 공께서 독서와 낚시를 즐기시며 심신을 휴양하시던 곳이기도 하다. 문숙공께서 여진정벌을 마치고 개선할 때 여진국인 웅단(熊丹)이란 여인이 따라와서 정성껏 시중들다가 문숙공께서 1111년 5월 8일에 하세하시자 못 옆 암상(岩上)에 올라가 통곡하고 못에 투신, 순사한 사실이 있어 이곳을 그 후 웅담(熊潭)이라고 명명하고 동명(洞名)도 웅담리라고 하였으며, 그 바위를 낙화암(落花岩)이라고 하였다.
장내에는 상서대라고 각한 비석이 있고, 종중에서 거기에 단을 설치하고 문숙공 이하 오위(五位)의 비위(碑位)를 모시고 추원단(追遠壇)이라고 하였으며, 그 후 상서공과 충간공 이위도 추배하였다.
○ 六世 휘(諱) 언이(彦) 문강공(文康公):문숙공의 일곱 아들 중 여섯째 은청광록대부정당문학호부상서판형부사상주국치사 (銀靑光祿大夫政堂文學戶部尙書判刑部事上柱國致仕) ○ 七世 휘(諱) 돈신(惇信) 시랑공(侍郞公):문강공의 6형제 중 셋째 중봉대부상서이부시랑동궁시강학사 (中奉大夫尙書吏部侍郞東宮侍講學士) ○ 八世 휘(諱) 상계(商季) 유수공(留守公) 시랑공의 독자서경부유수사자금어대 (獨子西京副留守賜紫金魚袋) ○ 九世 휘(諱) 복원(復元) 녹사공(錄事公):유수공(留守公)의 독자(獨子) 태상부녹사 증 은청광록대부상서성좌복야한림학사 (太常府錄事 贈 銀靑光祿大夫尙書省左僕射翰林學士) ○ 十世 휘(諱) 순(純) 어사공(御史公):녹사공의 독자 감찰어사 증 은청광록대부수태위문하시랑평장사 판상서형부사 (監察御史贈銀靑光祿大夫守太尉門下侍郞平章事判尙書刑部事) ○ 十一世 휘(諱) 보(珤) 문현공(文顯公):어사공의 독자 삼중대광수첨의정승우문관대제학감춘추관사 판선부사치사영평부원군 (三重大匡守僉議政丞右文館大提學監春秋館事 判選部事致仕鈴平府院君) ○ 十二世 휘(諱) 안숙(安淑) 양간공(良簡公):문현공의 넷째 아드님 추성익위좌명공신 삼중대광도첨의찬성사 영평부원군 (推誠翊衛佐命功臣 三重大匡都僉議贊成事 鈴平府院君) ○ 十三世 휘(諱) 척(陟) 영평군(鈴平君) 보리공신(輔理功臣) 영평군(鈴平君) ○ 十四世 휘(諱) 승순(承順) 충간공(忠簡公):영평군의 아드님 ○ 문숙공의 측실 웅녀비는 좌측에 별도로 세워둠.
그 이외에도 선조의 발자취가 많이 남아 있다.
고종 때 연천에 사는 박경선(朴慶善)이란 사람이 단소상(壇所上) 3리 허에 작답(作畓)하고 인수로(引水路)를 개설하려고 괴목(槐木) 1주를 벌목하려 하였으나 우리 종중에서 이를 금지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박경선은 그때 우리 종중을 무시하고 인부를 시켜 강제로 벌목하려 하였으나 성사하지 못했다. 박경선은 그래서 우리 문중을 모해코자 윤가들이 역모를 꾀하여 허설제천(虛設祭天)하고 있다고 당국에 밀고하였다. 당시의 영의정인 김좌근(金左根)이 포장(捕將) 김병국(金炳國)을 시켜 조사한 바 문숙공의 제단임이 판명되어 무사히 넘겼고, 도리어 영의정 김좌근은 박경선을 무고죄로 흑산도에 귀 양 보냈던 것이다. 박경선의 아들 박원중(朴元中)은 그 후 원한을 품고 상서대를 무너뜨리려고 단하(壇下)에 또다시 수로를 개설하려 하였는데, 파주군 내 유림(儒林)들이 상소하여 영의정 김좌근이 박원중을 함경북도 경원(慶源)으로 귀양 보내어 무사했던 것이다. 그 후 1960년 경자 4월 추원단(追遠壇)을 광축(廣築)하고 낙화암 위에 낙화암이란 작은 비석을 세우고 초혼(招魂)해서 웅녀의 혼을 위로하고 위령제를 행하였다. 추원단의 제향(祭享)은 매년 음 10월 2일에 거행하였으나 태사공 묘소 추향일과 문숙공 묘소 추향일이 변경됨으로써 79년도부터는 음 10월 5일로 제향일을 바꾸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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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여충사(麗忠祠)
문숙공의 묘소는 고려 예종 6년(서기 1111년)에 예장(禮葬)한 것인데 조선조 연산군 당시에 이 지역을 왕의 수렵지구로 삼기 위하여 파주군민을 강제로 이주시키고 출입을 통제하였기 때문에 부득이 수호가 소홀히 된 틈을 타서 영의정 심지원(沈之源)을 투장하였기 때문에 실전되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영조 계미 즉 1763년에 이르러 심문(沈門)에서는 그 투장한 사실을 더욱 은폐하기 위하여 심지원의 무덤 앞에 있는 문숙공묘소의 봉분을 낮추어 작은 무덤으로 사초(莎草)하고 이호문(李好文)이라는 엉뚱한 고비(古碑)를 옮겨다 그 고총(古塚)앞에 세운 것을 우리 종중에서 발견하고 조사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이호문〔이호문(李好文):고비(古碑)〕의 후손되는 자를 추궁한 결과 심문에서 토지를 사주면서 그 고총이 자기 조상의 무덤이라고 호칭하고 제사를 지내달라고 청탁하기에 그 고비를 옮겨주었다는 사실을 실토받기에 이르렀다. 그와 동시에 묘하 길옆에 있는 토분을 파보고 그것이 종중 문헌에 전해오는 문숙공의 교자총(轎子塚:교자는 여진정벌 당시에 임금께서 하사하였던 수레이다)이 틀림없음을 확인하였다.
예부터 그 고총은 “윤시중(尹侍中)의 분묘(墳墓)”라는 전설이 있었으나 고증이 어려웠던 차에 이모(李某)의 실토와 교자총의 확인 등으로 그 고분이 문숙공의 분묘에 상위(相違)없음을 비로소 확인하게 되었다. 그와 같은 사실이 입증되어 종중에서 회의를 거듭한 끝에 좌윤(左尹) 면교공(勉敎公)이 선두에 나서서 영조대왕 앞에 상소하였고, 좌상(左相) 동도공(東度公:후에 영의정)이 국왕에게 직접 상주하자 영조대왕은 이 사건을 경기감사에게 처리하라고 명령을 내리셨는데, 비석과 지석이 없으므로 다만 이호문(李好文)의 고비(古碑)를 제거시키고 양가에게 그대로 수호하라는 판정을 내렸을 뿐이었다. 우리 종중에서는 그대로 순종할 수 없으므로 다시 현장을 답사하다가 그 고분 좌편 10보 밖에 있는 도랑에 묘비를 묻었다는 고로(古老)의 전언(傳言)을 듣고 파헤쳐 드디어 문숙공의 묘비를 깨뜨려 묻었던 묘비조각을 발견하였다. 그렇게 되어 좌상 동도공께서는 다시 국왕에게 문숙공의 분묘를 고제(古制)대로 개봉축(改封築)하고 심호(尋護)하도록 하는 어명을 앙청(仰請)하였던 것이다.
영조대왕은 그 상주에 접하여, “천도가 소소하여 후손들의 성의가 지극하여 천년 고비를 찾았으니 주군을 동원하여 문숙공의 묘는 종전대로 봉축할 것이며, 심지원도 정승을 지낸 왕실의 외가이니 동산소(同山所)하라”는 교지를 내리셨다. 그것은 영조 임신 즉 1764년 5월이었는데, 주군(州軍)이 동원되어 심지원의 무덤 앞을 깎아 문숙공의 분묘를 크게 봉축하였고, 영조대왕은 예관(禮官)을 보내어 문숙공 묘전에 치제(致祭)하시었다. 그렇게 되어 심가(沈家)의 세 무덤은 그냥 남아있게 되었으나 그동안에 선조 문강공의 묘소는 영구히 실전되었다. 그 산송(山訟) 당시에 종중에서 나가신 도사 희복공〔都事 熙復公:시조 24세 남원파(南原派)〕은 국왕 앞에서 불경한 언사가 있었다는 죄과(罪科)로 벌을 받고 장독으로 종명(終命)되시었다. 그때 심정최(沈廷最)도 투장한 죄목으로 처벌되었던 것이다.
심지원은 그 조부의 무덤을 투장했을 뿐만 아니라 1663년경에 자신도 문숙공 분묘 뒤에 투장하였는데, 300여 년이 지난 1950년 6·25 동란 당시에 미군 폭격기에 의하여 심지원의 분묘에 폭탄 2발이 떨어져 분묘가 파헤쳐지고 비석이 파손되어 달아난 사실이 있었다. 심묘(尋墓) 당시에 종중의 성금으로 와가구간(瓦家九間) 초가 팔간(草家八間)의 묘사(墓舍)를 짓고 위토전(位土畓) 29두락과 전(田) 오일경(五日耕)을 매입하였다. 그 후 순조 5년(1805년)에 이르러 유사(有司) 곡씨(穀氏) 주관으로 제청(祭廳)으로 와가 14간을 신축하여 이르기를 분수재(汾水齋)라 칭하였다. 철종 3년(1852년)에 묘소의 사초(莎草)를 다시 할 때에 토산종인(兎山宗人) 승원(承源)씨가 위토전 1일 반경을 헌납하였다. 그리고 1856년에는 영풍군(鈴豊君) 공의 주관으로 제청과 묘사를 크게 보수하였다.
그 후에 일정말기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묘역의 송목(松木)을 전부 강제 공출 당하게 되어 수백 년 조림한 송목이 전부 벌목되었다. 그때에 시조 31세손 석훈(奭勳) 씨가 군수에게 교섭하여 재실 건축용 임목만을 넘겨받아 당시 경성에서 개업하고 있던 의학박사 치형(致衡) 씨의 성금 5000원과 기타의 성금으로 현재의 재사(齋舍)를 개축하였다. 묘사는 수시 보수되어 왔으나 퇴락되었기 때문에 1972년 훼철하고 대종회장 우경(宇景) 씨 주관으로 묘사를 개축하였다.
분수영당(汾水影堂)은 1932년 종약장(宗約長) 용식태(容植台:판서)와 석훈(奭勳)·석도(錫濤) 제씨(諸氏) 주관으로 황해도 웅진 종문의 성금 10,000원과 기타의 성금으로 신축하고 문숙공의 영당을 봉안하였다. 영정(影幀)은 함경남도 북청 만뢰사에 예부터 봉안되어 있는 장군복(將軍服) 영정을 묘사해서 모셨고 문관복(文官服) 영정은 그때 새로 그려서 봉안한 것이다. 교자총은 문숙공께서 여진정벌 당시에 국왕으로부터 하사받은 수레를 매장한 무덤인데, 철종 12년 개성유수 교성공이 개수립 한 교자총비가 있다. 또한 심묘시 견문록에 따르면 묘소의 청용 밖에는 전마총(戰馬塚)이 있었다고 하는데 2곳은 여진정벌 때 국왕으로부터 하사받은 전마를 묻은 곳이라고 전한다. 문숙공 신도비는 1966년에 시조 34세손 경수(敬秀) 씨의 독담으로 건립하였는데, 비문은 문학박사 노산(鷺山) 이은상(李殷相) 씨가 대종회장에 취임하여 3년간에 걸쳐 각 종문의 성금으로 곡장(曲墻)을 쌓고, 무관석(武官石), 장명등, 양마석(羊馬石), 동자석 등 많은 석물을 새로 갖추었고, 상석(床石)은 시조 32세손 기주(起柱)씨의 헌금에 의해 큰 것으로 갈아놓았다. 그때 영당과 재실도 보수하고 영당 앞에 작은 연못을 파서 그 주위에 9성의 표석을 세웠다. 묘산에는 노송 4주(현재는 2주)가 있었는데, 1956년경에 유사가 재실수리비에 충당한다는 구실로 매각한 것을 종인 태길(泰吉) 씨가 그 대금 12,000원을 돌려주고 보호한 것이다.
문숙공의 묘소는 1988년에 지방문화재 제12호로 지정받아 파주시장이 관리책임자로 되어있다. 여충사 문숙공 묘산은 13정보(町步)인데, 실묘 당시는 심가(沈家)가 투장하면서 관리하여 오다가 심묘 된 후에도 그 묘하에 그들이 거주하여 관리하였던 모양이다. 조선조 당시는 사패지로 받지 않으면 산림은 국유이었고, 개인 소유는 인정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 묘하에 우리 종인이 거주하지 않았던 탓으로 산림은 심가들이 관리한 성싶다. 그래서 심문(沈門)에서 투장하고 사패지로 받은 사실이 있었기 때문에 심묘 후에도 임야 소유권 문제로 분쟁이 계속되어 왔다. 그러다가 일정초기에 심가 측에서 소유권확인 청구소송을 제기하였는데, 당시의 판사가 우리 종중에서 증거로 제출한 국왕의 치제문을 채택하여 그 임야는 파평윤씨의 소유로 확인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니까 왜정 초기 일제강점이 되던 을사조약(乙巳條約) 그 무렵에 심가의 종손 심인구(沈麟求)가 그 묘산의 송목을 대금 700원을 받고 일본인에게 매각한 사실이 있었다. 우리 종문에서는 묘하게 거주자가 없었던 관계로 전혀 모르고 있었는데, 그 매매를 소개한 신석일(申錫一)이가 구전(口錢) 관계로 불평을 품고 우리 종문 유사 희배(喜培) 씨에게 밀고한 사실이 있었다. 그러자 유사 희배 씨가 고발하여 심인구는 구속되고 종중유지 30여 명의 연서로 당시 초대통감〔이등박문(伊藤博文)〕에게 진정하여 이등통감의 명령으로 그 송목 매매는 해약된 바가 있다.
그 후에 심치겸(沈致謙)·심치량(沈致亮) 양인이 언필칭(言必稱) 그 송목은 자기네 심씨가 200여 년간 조림한 것이므로 심씨 소유로 인정해달라는 소유권확인 청구소송을 제기하였던 것인데, 결국 수석판사는 “지난날 국왕으로부터 윤 문숙공의 묘산 송림으로 인증한 것이므로 심씨 소유로 인정할 수 없다”고 판시하여 우리 종중에서 승소함으로써 그 묘산은 현재 우리 종중소유로 등기되어 있으며, 비록 동산소라 할지라도 심가의 소유는 단 한 평도 없는 실정이다.
한편 대종회장 남의(南義) 씨가 취임한 후 1976년 11월 21일 개최된 종문총회에서 우리 종족의 오랜 숙원인 문숙공 동상 건립이 결의되고 곧이어 문숙공 기념사업회가 발족되자, 100만 종친의 열성적인 참여와 각계각층의 적극적인 협찬을 받아 마침내 1980년 5월 8일 각계인사 및 전국종친 2만여 명이 운집한 가운데 역사적인 문숙공 동상제막식이 거행되었다. 이와 아울러 오대사적현창사업도 연차적으로 확대 추진되어 1978년부터는 우리의 성역인 여충사의 정화공사가 정부의 호국유적사업의 일환으로 추진되어 이미 2억 2천만 원이 투입되어 1차 공사로 사당 및 홍살문(紅箭門) 신축, 재실 이축, 신도비 위치 변경, 진입로 조성 및 민가철거를 위한 역사(役事)가 시행되었다. 현재에도 묘역 전체에 걸쳐 조경 등 2차 공사가 정부사업으로 추진되고 있다. 또한 사당에 봉안되는 새 문숙공 영정이 문공부 위인선열 영정 심의위원회에서 표준영정으로 제정 확정되어(폭 100㎝, 길이 178㎝) 문공부 추천으로 일낭(一浪) 이종상(李鍾詳) 화백의 집필 하에 완성을 보았다. 이제 통일로(統一路) 주변에 위치한 우리 문숙공 묘소 및 사당 일원의 묘역은 우리 종문의 영역일 뿐만이 아니라 우리 국민의 민족정기와 국토통일의 상징으로서 길이 보전 수호되어야 할 국민적 성역으로서도 숭앙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문숙공 묘소 앞을 지나는 국도도 “윤관로(尹瓘路)”라 명명하여 더욱 빛을 내고 있다. |








여충사(麗忠祠)는 선조 문숙공의 묘소와 사당 및 교자총(轎子塚)이 있는 우리 씨족(氏族)의 성역(聖域)이며 호국유적(護國遺蹟)으로서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분수리에 있다.